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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의 여행/700 : 언어

미생(윤태호) : 격자 위 흰 돌과 검은 돌로 엿보는

by 평범한 과학도 2024. 6. 30.
미생 완간 세트
《이끼》의 작가 윤태호가 선보이는 대한민국 직장인을 위한 다음 웹툰『미생 완간 세트』. 이야기는 열한 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프로기사만을 목표로 살아가던 청년 장그래가 입단에 실패하면서, 미지의 세계였던 회사에 입사하면서 시작된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회사 일정 속에서, 합리적이고 배려심 깊은 상사들과 함께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간다. 취업준비생과 신입사원에게는 직장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매너리즘에 빠져 관성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대리, 과장에게는 자신의 일에 대한 긍지를, 미래를 꿈꾸기보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던 차장, 부장의 가슴을 새롭게 뛰게 해주는 활력소를 전해준다.

-kyobo 제공, 미생 책 소개 中-

 
 
읽은 기간: 2024.04.17 - 2024.04.23
이 글은 윤태호의 미생을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한 수필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둑은 한정된 공간을 서로 나눠갖는, 그래서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 자가 승리하는 게임이다. 공간이 무한하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한정된 대상을 동시에 탐하기에 자연스레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철저히 손익을 계산하여 치밀하게 공간을 확보하는 이도 있는 반면, 본능에 충실한 채 공격적으로 접근하는 이도 있다. 바둑의 규칙 자체가 한정된 환경이나 재화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당연하게도 바둑에는 우리의 성격이나 태도, 가치관 같은 것들이 투영된다. 마찬가지로, 수백년의 역사를 통해 다듬어진 바둑 속 격언들은 실은 갈등 상황 속에서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지에 대한 이정표이며 우리 삶 속에서도 통용될 수밖에 없는 지혜다. 그렇게 한평생 바둑만 공부한 한 청년은 바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이해한다. 바둑의 격언들이 장그래의 회사 생활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장면들을 보며 나 역시 매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먼저 안정되고 상대를 공격하라는 아생연후살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불필요한 것을 버리라는 봉위수기.
바둑에만 한정되지 않는 조언들이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한 바둑 만화에서 그치지 않고 여전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바둑에 빗대어 혹은 바둑을 초월하여 누군가의 삶의 애환을 가감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직 학생 신분인 나는 이 만화를 보고서야 매일 아침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뛰어다니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취업 고민에 머리를 싸매는 대학교 4학년 형, 누나들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고, 퇴근만 하면 녹초가 되시는 우리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 만화 한 편 본 것이 다이지만, 그래도 그 차이가 내겐 작지 않게 느껴졌다. 내게 이 만화를 보는 일은 오락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일일 뿐아니라, 바둑의 지혜를 빌려 나름의 답을 찾는 일이고, 웅장한 야경 속에서 하나의 불빛을 맡은 이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는 일이다.
 
글 또한 지식재산권을 가지는 지적 창작물입니다. 배포, 전송 시에는 댓글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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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한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눈에 훤히 보이는 길을 너무 뻔해 마다해서 아쉽게 패한 많은 대국이 떠오른다.
사는 게 의외로 당연한 걸 마다해서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 같다.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어려워도 꼭 해야 하는 것. 쉬워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1권, 298-299p)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게으름, 나태, 권태, 짜증, 우울, 분노. 모두 체력이 버티지 못해, 정신이 몸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증상이야.
네가 후반에 종종 무너지는 이유, 데미지를 입은 후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귀가 더딘 이유, 모두 체력의 한계 때문이다.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승부 따윈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충분한 고민을 버텨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이란 외피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 돼.
(4권, 75-77p, 몸이 상한 오 과장을 보며 생각에 잠긴 장그래)

후회하고 자괴감에 빠져 또 다른 후회를 만들지 말자.
넘어졌을 때 상처를 보며 속상해하거나 울고 있는 것은 어떤 해결도 될 수 없다.
약을 찾든지 견디고 벌떡 일어서든지 할 일이다.
모르면 물어보고! (4권, 123p, 과거를 원망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 장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과정이 전부야!
결과는 우리 손 안에 있지 않아!
결과까지 손아귀에 넣으려다 보니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거라고.
(4권, 223-224p, 박 과장을 연민하는 장그래에게 김 대리가 건네는 말)

정말 안타깝고 아쉽게도, 반집으로 바둑을 지게 되면, 이 많은 수들이 다 뭐였나 싶었다.
작은 사활 다툼에서 이겨봤자, 기어이 패싸움을 이겨봤자,
결국 지게 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빈집으로라도 이겨보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이 반집의 승부가 가능하게 상대의 집에 대항해 살아준 돌들이 고맙고,
조금씩이라도 삭감해 들어간 한 수 한 수가 귀하기만 하다.
순간순간의 성실한 최선이, 반집의 승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순간을 놓친다는 건 전체를 잃고, 패배하는 걸 의미한다.
당신은 언제부터 순간을 잃게 된 겁니까. (4권, 282-285p)

내가 진짜 알고 싶은 게 뭘까... 난 그저... 열심히 일하는 흉내를 내고 싶은 것인가? (5권, 212p)

난 당신들과 다르잖습니까.
이 회사에 들어와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이 모든 기회와 상황이.
그런데 그렇게 한 칸 한 칸 성장하다 올라선 계단 끝에 절벽이 기다리게 할 순 없어요. (7권, 144-146p)

'소년이로학난성'은 모르겠고, '일촌광음불가경'은 알겠어.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8권, 127p)

바둑은 형세가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강수나 승부수를 던질 수 있고 때로는 옥쇄를 각오하고 죽음 앞으로 돌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어떠한가.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옥쇄를 각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는 승부수조차 한 번 던지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다. (9권, 242p, 박치문 기자의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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