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다자이 오사무
- 출판
- 민음사
- 출판일
- 2012.04.10
청춘의 한 시기를 통과 의례처럼 거쳐야 하는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작
오직 순수함만을 갈망하던 여린 심성의 한 젊은이가 인간들의 위선과 잔인함에 의해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 1948년 서른아홉의 나이로 요절하여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남긴 일본 현대 문학의 대표적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다. 어떻게든 사회에 융화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럽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는 패배의 기록을 통해 현대 사회를 예리한 고발하고 있다. 함께 실린 '직소'에서는 유다의 인간적인 측면을 저자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새로이 조명하고 있다.
-kyobo 제공, 인간 실격 책 소개 中-
읽은 기간: 2024.10.17 - 2024.10.21
이 글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한 수필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나친 어두움. 너무나 지나쳐서 심지어는 더럽고 퀴퀴함이 느껴지는 그런 어두움을 접하면 마치 그 어두움이 내게도 전염되는 듯하다. 대개 그런 경우는 불쾌함이 동반되지만, 이번에는 왜인지 그리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신선하며 충격적이다. 내일이면 밝아오는 하룻밤의 암흑이라기보단 쉽사리 가늠하기조차 힘들 만큼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칠흑 같은 어두움에 가깝달까. 그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서인지, 이 어두움은 싫지만은 않다. 되려 그 세월의 깊이에 압도당하며 경외감을 느낀다. 무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고민이더라도 치밀하고 깊다면 내겐 충분히 매력적이다.
요조의 세상만사에 대한 불평불만,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을 접한 나의 감상이다. 세상에 대한 날이 선 비판은 지나친 것 아닌가 싶다가도 그 의미 하나하나를 곱씹다 보면 쉽사리 반박하긴 힘들다. 오히려 요조가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다만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비관적일 뿐임을 이해하게 된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한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는 개념에 대한 저의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는다’ 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 사람한테서 듣고 자기가 속은 것을 차차 알게 되었을 때, 인간들이 느낄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어떤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처세술? 정말이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한테 처세술이라니? 어떻게 하면 저처럼 인간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행동이 속여도 건드리지 않으면 탈이 없다는 둥 똑똑하고 교활한 처세술과 마찬가지가 되는 걸까요.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祠)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모두가 알듯,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렇기에 떳떳하고 자신 있는 주장만으로 가득 찬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금기가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타인과 교류하기 위해 이를 적절히 감추며 살아간다. 이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하는 은폐가 주인공 요조에겐 남을 속이는 행위이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익살이자 처세술처럼 비췄다. 결국 사람을 만나 상호작용하는 일은 곧 ‘타인이 원하는 나’의 모습만을 적절히 보여주고 그렇지 않은 모습은 적절히 숨기며 서로를 속이는 일인 것이다. 타인에게 존경받는다는 이야기는 언제든지 그 존경이 화살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나는 나의 결점을 너무나 잘 알기에, 많은 존경을 받으면 받을수록 지금껏 잘 숨겨온 결점이 혹여나 드러나, 이 존경들이 비난으로 돌아올까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요조에게 존경받는 일이란 그저 소름 돋칠 만큼 기피하고 싶은 일이다.
이런 요조의 가치관이 내겐 꽤나 ‘설득력 있는’ 염세주의로 비치는 까닭은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상처받으며 나름의 논리를 착실히 쌓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고통의 흔적이 내게도 전달되는 것만 같아 마냥 요조를 나무랄 수만은 없었다. 누군가에겐 가벼운 일도 세상을 섬세히 바라보는 이들에겐 대수처럼 여겨질 수 있고, 심지어 같은 일을 겪고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누군가가 그렇게 느꼈다고 해서 그걸 나무랄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이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토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그렇게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름 요조를 존중하고 옹호하며 책을 읽어나가서인지, 그도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고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나갈 때 왠지 모를 뿌듯함으로 그를 응원했다. 그렇게 소중한 감정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줄로만 알았다. 지금 느끼는 행복을 두려워 말고 순간을 오롯이 즐기길 바랐다.
그때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은 개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는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자면 조금 멋대로 굴게 되었고 쭈뼛쭈뼛 겁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호리카의 말을 빌리자면 이상하게 인색해졌습니다. 또 시게코의 말을 빌리자면 시게코를 별로 귀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던 시기에 나는 오사카의 스타벅스 안이었다. 이곳에는 일본인들만큼이나 서양인들도 많았고 여러 국적이 뒤섞여, 들리는 언어와 보이는 외형만 고려하면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곳에서 나는 무척 당돌했었다. 일본어는 단 한마디도 못 하면서 번역기만 손에 쥔 채 오사카 곳곳을 다녔고, 땀에 젖어 엉겨 붙은 머리는 안중에도 없이 모자를 벗고 다녔다. 한국이었다면 체면치레로 모자도 쓰고 조심스레 말을 걸며 부끄럼을 탔을지도 모르겠지만 곧 이곳을 떠날 텐데, 이곳 사람들에겐 난 이방인 혹은 무명인일 텐데 뭐가 어떻냐는 식이었다.
그렇게 여행하다 이 대목을 만나니 크게 와닿았고 공감되었다. 세상은 왜 내게 강요하는 것이 많을까, 평범이라는 단어로 개인을 억압하고 있진 않을까 하며 세상을 경계하곤 했었다. 그렇게 종종 세상 탓을 하곤 했으나 실은 세상을 어찌 바라보는지에 대한 나의 문제 역시 얽혀있었다. 내가 오사카를 그렇게 바라보았으니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며 반대로, 내가 속한 세상은 그렇게 바라보지 못했다. 결국 내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을 마주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부담스러웠던 세상의 시선이 한결 가벼워졌다.
일본 근대 문학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자연주의 문학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보다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이 뒷받침된 진지한 자기 모색의 문학이었다는 점에서 이 범주의 사소설들이 지니는 편협성, 평탄함, 범속성 등의 약점이 상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명제와 더불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명제 또한 이 세상에서 생을 부여받은 모든 인간의 물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춘미 교수님의 작품 해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와 현재적 의미 中)
소설의 분위기가 어둡고 침울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삶의 의미를 고찰하고 갈망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르기에 감상 후의 꺼림칙함을 괴리에 대한 포용으로 치환하길 바라며, 나와는 다른 글들을 읽어가며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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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도 뭔가를 훔치듯이 쭈뼛쭈뼛 전혀 즐기지 못하고, 그러고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에 몸부림쳤습니다. 즉 저에게는 양자택일하는 능력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저의 소위 ‘부끄럼 많은 생애’의 큰 원인이 된 성격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20p)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한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는 개념에 대한 저의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는다’ 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 사람한테서 듣고 자기가 속은 것을 차차 알게 되었을 때, 인간들이 느낄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어떤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었습니다. (23p)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26p)
다케이치도 설마하니 저의 그런 행동이 위선에 찬 계략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한 듯 제 무릎에 누운 채 “틀림없이 여자들이 너한테 홀딱 반할 거야.”라고 무식한 아부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 말이 다케이치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악마의 끔찍한 예언 같은 것이었음을 저는 나중에 절감했습니다. (33p)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고 싶어 하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게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 낸 것입니다. (38p)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거나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을 다케이치한테서 전수받은 저는 예의 여자 손님들 몰래 조금씩 자화상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40p)
그는 저와 형태는 달랐지만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저의 동류였습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익살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익살꾼의 비참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44p)
그야 그렇겠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속을 알 수 없는 더 끔찍한 것이 있다. 욕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허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색(色)와 욕(慾), 이렇게 두 개를 나란히 늘어놓고 보아도 부족한 그 무엇. 저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인간 세상의 밑바닥에는 경제만이 아닌 묘한 괴담 비슷한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48p)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이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61p)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토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그렇게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65p)
처세술? 정말이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한테 처세술이라니? 어떻게 하면 저처럼 인간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행동이 속여도 건드리지 않으면 탈이 없다는 둥 똑똑하고 교활한 처세술과 마찬가지가 되는 걸까요.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祠)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91p)
그때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은 개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는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자면 조금 멋대로 굴게 되었고 쭈뼛쭈뼛 겁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호리카의 말을 빌리자면 이상하게 인색해졌습니다. 또 시게코의 말을 빌리자면 시게코를 별로 귀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92p)
멀리서 어린 소녀의 서글픈 노랫소리가 환청처럼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불행. 이 세상에서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불행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넙치가 아니라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뻔뻔스럽게 잘도 이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122p)
일본 근대 문학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자연주의 문학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보다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이 뒷받침된 진지한 자기 모색의 문학이었다는 점에서 이 범주의 사소설들이 지니는 편협성, 평탄함, 범속성 등의 약점이 상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명제와 더불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명제 또한 이 세상에서 생을 부여받은 모든 인간의 물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60p, 김춘미 교수님의 작품 해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와 현재적 의미 中)
사회가 격변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질 때, 온갖 허위와 위선을 타파하고자 ‘혁명’을 지향하다 기존의 두꺼운 벽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한 자가 목숨을 걸고 자기 파멸로 치닫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것이다. (179p, 김춘미 교수님의 작품 해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와 현재적 의미 中)
현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절망이 요구되는 격변기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가치관의 혼란, 세대 간의 갈등 증폭,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 간의 대립 구조 심화 등으로 어떤 해법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한다. 이런 때일수록 인간이기 때문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나약함, 불신감, 절망감에 목숨을 걸고 천착하고자 한 다자이 오사무의 작가적 자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자이의 절망이 그대로 해법이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처절한 자기반성과 책임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0p, 김춘미 교수님의 작품 해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와 현재적 의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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