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점
- 8.5 (2025.02.28 개봉)
- 감독
- 봉준호
- 출연
- 로버트 패틴슨, 나오미 아키, 스티븐 연, 토니 콜레트, 마크 러팔로
감상한 날짜: 2025.03.02
이 글은 봉준호 감독님의 미키 17을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수필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였고, 올해 가장 기다려졌던 영화 중에 한 편이었습니다. 이제 한 편 더 남았는데, 그 작품은 바로 박찬욱 감독님의 신작입니다. 평소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까다롭다고 여겼던 이병헌 배우도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올해의 시작을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으로 열었다면, 시간이 꽤 흘러 가을이 되었을 무렵에는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는 셀 수 없이 언급되는 한 질문이 있습니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주인공 미키 반스와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 미키에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처음엔 굳이 무거운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다소 진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16차례 죽음과 부활을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그런 질문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키 자신도 이젠 그 질문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더는 전처럼 죽음을 가볍게 흘려보낼 수 없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17번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크리퍼들은 미키17을 구해주었고,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본부에서는 이미 18번째 미키, 미키18을 복제한 뒤였습니다. 그렇게 미키18을 마주한 미키17은 본인을 용광로로 밀어 넣으려는 미키18에게 고백합니다. 지금껏 죽어왔던 것과는 다르다고, 지금까지는 내가 죽으면 내가 이어지는 것이지만 이번에 죽는다면 내가 아니라 네가 이어지는 것 같다며 살고 싶다고 절규합니다. 실은 모순적인 상황일 것입니다. 미키18과 미키17이 그렇게 다른 존재라면,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임을 미키17이 자각했다면, 이는 동시에 그 전의 수많은 미키들 역시 본인과는 다른 존재임을 인정한 셈이며, 지금껏 순순히 그리고 기꺼이 죽어주었던 과거를 부정하는 셈입니다.
지금껏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고, 심지어는 주변에서도 수없이 죽음을 물어왔지만 정작 미키 본인이 죽음과 나의 존재를 성찰한 건 다음 순서의 미키를 직접 두 눈으로 본 순간 즉, 지금까지는 연결되어 온다고 믿었던 기억들 사이의 벌어진 간극을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원래였다면 미키17의 기억은 미키18이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두 존재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부터 기억 사이의 틈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극대화하는 장면이, 미키17이 케네스의 저녁 만찬에서 있었던 일을 미키18에게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서로가 있었던 일을 서로에게 털어놓는 모습에서 둘은 완전히 구별된 존재임을 관객들은 이해하지만, 더욱 매력적이었던 설정은 미키18의 성격은 미키17과 정반대였다는 점입니다. 미키17은 어찌 보면 내성적이고 조용하지만 미키18은 억울한 일은 못 참는 불같고 공격적인 성격입니다. 티모의 배신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미키17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한편, 미키18은 태평하게 티모를 속이고 심지어는 제압하기까지 합니다. 케네스의 저녁 만찬에서 수치를 당하고도 식사 잘 먹었다는 말로 자리를 뜨는 미키17과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바로 총을 챙겨 케네스를 죽여버리겠다는 미키18의 대조적인 모습은 희극적인 동시에, 휴먼 프린팅을 하고 기억을 물려주더라도 과연 그 존재는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지, 얼핏 보면 비슷한 듯하지만 되려 완전히 다른 존재를 창조해낸 것은 아닌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도 던지는 듯합니다.
이 시점까지는 멀티플과 복제인간 기술이 실존한다면 과연 기억이 전달되는 존재를 어떻게 여겨야 할지, 미키17의 입장에 이입하며 영화에 몰입했습니다. 아마 영화의 결말도 이런 철학적인 의문과 결부되어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습니다. 그런 예상과는 달리 영화의 결말은 어쩌면 조금 가볍게 전개되었습니다. 바로 크리퍼의 등장입니다. 크리퍼는 상당히 모호한 등장인물로 생각됩니다. 미키17을 구해준 점을 보면 대가 없이 베푸는 선한 인물 같다가도, 인간 한 명의 죽음을 요구하는 모습은 희생의 대가는 꼭 치르는 계산적이면서도 냉혈한다운 면을 보여줍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크리퍼는 거의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 언급은 없었지만 가령 각 개체가 연결되어있다는 등의 생물학적인 특성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한 설명 없이 영화만을 보며 든 생각은 크리퍼는 마치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등장인물이 아닐지였습니다. 미키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도 미키를 알고 있고, 아기 크리퍼 한 마리는 피를 흘리며 총에 맞아 죽었고, 남은 한 마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임을 마마 크리퍼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크리퍼들을 걱정하는 미키17과 미키18에겐 너희 걱정이나 하라며 바보들(idiots)이라 부르는 대목에서는 마치 마마 크리퍼가 관객들과 같은 3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전지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말미에는 실은 크리퍼가 괴성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는 식의 설명이 나오지만 저는 이것 역시도 사실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젠 인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크리퍼가 굳이 그런 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 보여주지 않은 것뿐이지 아마도 크리퍼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말 그대로 인간 머리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는 굳이 인간 한 명의 죽음을 요구한 것 역시도, 죽게 되는 그 인간 한 명이 케네스 마샬이 될 것을 내다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크리퍼는 죽어야만 하는 미키를 살린 유일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죽는 게 더 자연스러운 존재이며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억지로 살려냈습니다. 그런 존재인 크리퍼와 영화의 결말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하게끔 합니다.
한편으로 영화 속 사회가 부러웠던 점은 현대 과학 기술에 대한 정치적, 철학적으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복제인간 기술을 원천 금하고 지구 밖에서만 허락한다니 꽤 이상적입니다. 최근 AI 개발의 가속화로 법적, 윤리적 책임이 개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여 걱정이었습니다. 이런 영화들을 통해 기술의 발전에 경각심을 갖고, 이를 경계하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잠시 가져보았습니다.
그 밖에도 영화 속 인상적인 몇몇 구절들이 있었습니다. 본인과는 딴판인 미키18을 이해하는 나샤를 보며 나도 전혀 이해 못 하는 나를 이해하는 준다는 독백에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고민해보기도 했고, 차량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동일한 기억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자책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미키17과 우연한 사고였으니 후유증으로 힘들어 말라는 미키18의 강인한 모습에선 같은 일이더라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키18 대신 미키17을 죽이려 드는 티모가 순한 게 더 편하다고 말할 때는 미키17에게 왠지 모를 측은지심을 느꼈습니다. 정말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세상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용광로에서 손을 내밀며 티모를 구해준 건 미키17이었을텐데 말이죠. 등등의 많은 여지를 남기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봉준호 감독님의 전편이 기생충이고 기생충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꼽히는 작품이라 그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남기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하는 예술가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미키 17>
사는 건 어떤 기분이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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