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기간: 2026.5.9 - 2026.5.17
이 글은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한 수필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다 표면은 바람과 부딪혀 진동을 일으키고, 그 표면의 불균일함은 빛을 사방으로 반사한다.
가만히 앉아 그 빛을 응시하고 있으면, 무언가 사람을 홀리는 듯한 오묘함을 띠는 듯하다. 잠시나마 온갖 상념들에 사로잡힌다. 수많은 선택과 행동들의 목적을 애써 찾아보지만, 결국은 삶의 무의미함으로 이어지는 덧없는 생각들이다. 그 빛은 삶의 허무와 권태로 나를 이끄는 환상의 빛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종종 우연한 순간에 멍하니 무의식에 빠져 자연히 허무에 잠식되는 때가 있다. 한참을 빠져 허우적대다 다시 의식의 끈을 붙잡고 나서야, 그제야 생각을 채우는 일보다 생각을 비우는 일이 배는 더 어려움을 깨닫는다.
하물며 갓 태어난 아이를 남겨둔 채 배우자가 곁을 떠났다면, 심지어는 제 발로 철길을 걸으며 삶과의 이별을 택했다면 그 무의식이 어찌나 격렬히 일상을 붙잡은 채, 결코 나를 놓아주지 않으려 할까. 자살은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하고 무책임한 회피일지 모른다.
나를 공허히 만드는 그 상념들은 실은 환상의 빛이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내 안에 존재하던 것이다. 빛에 환상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핑계를 대보지만 별 수 없다. 해답 역시 내 안에 찾는 수밖엔.
(평소 읽고 싶었던 단편 하나를 다 읽고 나면 그 단편집은 억지로 다 읽지는 않곤 합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은 환상의 빛 이외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고, 매력적입니다. 그리 두껍지 않으니 다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특히 옮긴이의 말이 글을 한층 더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네요.)
환상의 빛
다미오 씨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이고,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도모코도 저를 잘 따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는 아내와 젖먹이를 버리고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에게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말을 걸고는 합니다. (13p)
새로운 남편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죽어버린 전 남편에게 이렇게 열심히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참 불쾌한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리면 어느새 죽은 당신에게가 아니라,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에도 아닌,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깝고 정겨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해서 그만 황홀해질 때가 있습니다. 가깝고 정겨운 그 사람이 대체 누구일까, 저에게는 이것저것 다 알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14p)
당신이 말한 대로 삼십 분도 안 되어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조금 전의, 당신이면서도 당신이 아닌 다른 얼굴이 언제까지고 마음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그렇게 이상한 발작을 일으키는 눈이 사실은 당신의 본성일 거라고,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러고 나서 열흘 후에 갑자기 자살해버릴 낌새를, 왜 저는 바깥으로 쏠린 왼쪽 눈에서 알아채지 못했을까요...... (19p)
저는 그때 가난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망했던 것입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국도로 사라진 할머니의 조그마한 뒷모습이나 막벌이꾼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한낮인데도 전구를 켜지 않으면 안 되는 축축한 방 가득히 되살아났습니다. (31p)
왜 오쿠노토의 최북단에 있는 쇠락한 어촌으로 시집 갈 마음이 든 것인지, 저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여덟 살이 되는 딸을 데리고 오쿠노토에서 일부러 맞선을 보기 위해 아마가사키까지 찾아온 세키구치 다미오라는 서른다섯 살의 남자에게 마음이 끌려서도 아니고, 공해에 찌든 연기와 사우나나 카바레의 네온사인이 가난 냄새를 풍기는 아파트를 에워싸고 있는 아마가사키라는 곳이 지겨워져서도 아니며, 아직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러브호텔의 시트를 갈아 까는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신이라는 사람이 따라다니는 풍경에서, 소리에서, 냄새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제 가슴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신 국도 서쪽으로 멀어저간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40p)
저는 덧문이 덜커덕 하고 소리를 낼 때마다 눈을 뜨고 천장의 꼬마전구를 쳐다봤습니다. 대체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이불이나 베개, 자신의 것이 아닌 냄새에 언제까지고 익숙해지지 않은 채 저는 몇 번이고 그렇게 다가오는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때만은 죽은 당신도, 당신의 뒷모습도 머릿속에 접어 넣고 요란하게 넘실거리는 바람과 파도의 한복판에서 살짝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52p)
그런데도 부엌에서 도모코와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목욕탕에서 들려오는 다미오 씨와 유이치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아아, 저게 당신과 유이치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허리께가 싸악 차가워지면서 뭔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돌연히 이 세상에서 사라진,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왜 죽었을까, 왜 당신은 치이는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선로의 한가운데를 걸어갔던 것일까, 대체 당신은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가고 싶었던 것일까. 저는 그릇을 든 손을 멈추고 설거지대 구석에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지금 바로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그 마음의 정체를 알려고 필사적으로 이리저리 생각했습니다.
(56p)
제가 그 남자를 마음에 담아둔 것은 그 사람이 심한 사팔뜨기였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훔쳐온 날 밤, 비비면 비빌수록 심해지던 당신의 눈과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그 남자에게서 뭔가 심상치 않은 점을 느낀 것은, 이를테면 제 감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에 죽으러 온 거다, 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58p)
“바다를 보고 있었더니 그냥 슬퍼져서요.”
(62p)
한 사람의 인간이 죽으려고 결심하기에 이르는 다양한 이유를 맞춰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당신과는 아무래도 잘 맞춰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그날 밤 당신의 행동이 어떤 간격까지 좁혀진 것으로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고, 거기에서 선로의 한가운데까지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은 오히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공동 같은 것이 되어갔습니다. (67p)
“전 그 사람이 왜 자살했는지, 왜 레일 위를 걷고 있었는지,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게 돼요....... 저기, 당신은 왜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야.”
(79p)
저는 당신의 뒷모습에 말을 거는 것으로, 위태롭게 시들어버릴 것 같은 자신을 지탱해왔는지도 모릅니다.
(80p)
대체 무슨 생각에서 다미오 씨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 후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확실히 이 세상에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병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체력이라든가 정신력이라든가 하는 그런 표면적인 게 아닌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중요한 혼을 빼앗아가는 병을, 사람은 자신 안에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81p)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82p)
박쥐
두 사람이 숨어있을 그 주변 위의 하늘에는 엄청나게 많은 박쥐가 어지러이 날고 있었다. 나는 소름이 끼쳤고, 언제까지고 박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둔하고 까만 눈을 가진, 새라고도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생물의 추악한 춤이며, 땀과 허무로 처발라진 관능의 무수한 비말이며, 기괴한 표정에 조종되는 그 영혼들의 어쩔 수 없는 술렁거림이었다.
(133p)
옮긴이의 말
나이가 들면서 우연이 삶을 지배한다는 믿음이 짙어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뭔가를 잃어버리는 일의 연속이다. 그 뭔가는 늘 모호하다. 그러니 말끔하게 정리된 이야기에서는 거짓의 냄새가 난다. 거짓은 잃어버린 그 모호한 것에서 기인하는 외로움과 불안에서 온다. 그 외로움과 불안 역시 모호하니 거짓말을 해서 살아야 한다. 살아가려면 그 거짓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은 그 뭔가를 잃어버린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살아가기 위한 거짓말 사이에 자리한다. 뭔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살아가기 위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165p)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보는 그 사람일 뿐이다. 그가 자살한 이유 또한 알 수 없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가 자살한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끝내 그 이유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자살할 만한 이유는 살아남은 사람이 스스로가 납득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를 온전히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미코가 어렴풋이 찾아낸 것은, 위에서 말한 ‘사람의 혼을 빼가는 병’이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의 마음에는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빛나기 시작하는 잔잔한 바다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게 비칠 것이고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그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다고, 유미코는 생각한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환상의 빛’이다.
(169p)
'책으로의 여행 > 800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역하는 말들(황석희)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참 (0) | 2026.04.02 |
|---|---|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지금 로맨스 소설이 내게 줄 수 있는 모든 것. (2) | 2026.01.08 |
| 단 한 번의 삶(김영하) : 우연한 생 (7) | 2025.08.03 |
| 인간 실격(다자이 오사무) : 다다를 수 있는 염세의 끝에서 (3) | 2024.12.01 |
| 노르웨이의 숲(무라카미 하루키) : 가짜 공감 진짜 공감 (5) | 2024.09.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