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한 날짜: 2026.05.23
이 글은 봉준호 감독님의 설국열차를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수필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중후반부까지 '계급이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실로 합리적인 사회적 장치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꼬리칸에 탄 이들은 처음 열차에 오를 때 해당 칸의 티켓을 구매했었다. 열차의 꼬리칸에 머무는 것에 사전에 동의했다는 의미다. 심지어 꼬리칸에서 앞으로 한 칸씩 전진하며 펼쳐지는 광경들은 식물을 기르고, 초밥을 만들며,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등 모두 각자의 칸에서 맡은 소임을 다하는 모습들이다. 혁명의 무리들은 초기의 계약을 어기고 본인들의 칸에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들인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꼬리칸의 혁명을 측은지심은 배제하고 철저히 이성적인 시선에서만 바라본다면, 실은 사회적 계약을 파기하는 반란은 아닐까? 한정된 자원 속에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인구의 무한한 증가를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 역시 언뜻 합리적으로 들린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계급의 정당화에 있어서 이 영화는 크게 두 반박을 제기하는 듯하다. 첫째로, 기차 내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계급은 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단순한 계급을 넘어 인권이 유린되는 한계점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엔진을 유지하기 위해 작은 아이들이 강제 노동을 해야만 했고, 이는 어린 아이들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었을 뿐더러 꼬리칸 부모들의 동의 역시 없었다는 점이 하나의 화두를 제시한다. 벤담의 공리주의처럼, 기차 안 전체의 행복을 위해선 불가피했던 소수의 희생이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내가 윌포드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까? 꼬리칸의 식인을 멈추기 위해 다들 자신의 팔 한쪽을 자르는 와중에도 두려움에 본인의 팔은 자르지 못했던, 그리고 그 사실이 여전히 본인을 옥죄고 있던 커티스가 한 팔을 희생해 엔진을 멈추고 아이를 구하는 연출은 큰 카타르시스였다.
내가 이 영화의 본질과 더 가깝다고 여기는 지점은 두 번째 반박이다. 바로 '설국열차 바깥에서도 생존할 수 있을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을 처음 영화에서 제시하는 사람은 열차의 문을 여는 보안 전문가 남궁민수(송강호 배우)다. 혁명군들이 한 칸씩 전진하는 와중에도 그는 일명 '크로놀'이라는 마약을 모으는 일에만 집중한다. 심지어는 유흥을 즐기는 앞칸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들의 크로놀을 빼앗는 것에만 집중한다. 이는 엔진 칸에 도달하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채 전진하는 커티스와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후에는 이 크로놀들을 모아 기존의 전진하던 방향과는 수직인 방향의 문을 폭발로 터뜨려, 새로운 문을 열고 열차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만일 기차 안에서만 머문다면 차라리 마약에 취해 지금의 본능과 욕구에만 충실한 삶으로도 만족하겠다는 허무주의가 느껴지기도 했고, 수평 방향으로만 전진하며 기차의 질서를 부정하던 커티스와는 달리 수직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며 그간 갖혀 있던 기차의 존재 자체에 최초로 의문을 던지는 인물처럼 보였다. 보통은 커티스처럼, 우리를 가두고 있는 틀 안에서 정답을 찾으려 하지만 실은 그 틀 자체가 틀렸을 수 있음을 지적하는 인물이다. 기차의 폭발 후 바깥 세상으로 나갔을 때 보인 한 북극곰은 그런 남궁민수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다소 개연성이 아쉬운 장면들도 있었지만, 그런 걸림들이 비교적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영화 자체의 메시지가 강렬했다.
<설국열차>
설국열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옆에 있는 문을 열자이다.
여러분도 꼭 여러분 옆에 있는 문을 찾기를 바란다. -박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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