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조지 오웰
- 출판
- 민음사
- 출판일
- 2009.01.07
1945년에 간행된 조지 오웰의 대표작. 어떤 농장의 동물들이 늙은 돼지 메이저의 부추김에 빠져 농장주의 압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의 착취가 없는 '모든 동물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한다. 그러나 돼지들이 지도자가 되고 그 중에서도 힘이 세었던 스노볼을 돼지의 지도자 나폴레옹이 내쫓은 뒤로부터는 동물들이 옛날보다 더 혹독한 여건하에서 혹사를 당하게 된다.
이윽고 인간과의 거래가 부활하고 그 사회를 위하여 눈물겨운 투쟁을 했던 말 복서도 일할 수 없게 되자 도살용으로 인간에게 팔려서, 결국 돼지사회도 인간사회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고 하는, 권력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풍자소설이다.
-알라딘 제공, 동물농장 책 소개 中-
읽은 기간: 2022.7.3-2022.7.8
이 글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한 수필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노동해서 생산한 것을 인간들이 몽땅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오."
"인간은 생산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11p)
"그러므로 동무 여러분, 우리 삶의 이 모든 불행이 인간의 횡포 때문이라는 게 너무도 명백하지 않소?" (13p)
열심히 밭을 갈고, 알을 낳고, 젖을 만드는 동물들이 보기에 인간은 아무 능력도 없는 듯하다. 모순적인 점은 유능한 동물들이 바로 그 무능한 인간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동물들은 인간들이 제공하는 최소한의 양식과 보금자리 속에서 삶을 연명하고 있다. 그들이 생산한 모든 것들은 인간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만약 인간들이 없다면, 동물들은 그들의 노동의 제 몫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더 안락하고 배부른 삶을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들은 무슨 자격으로 동물들의 노동을 가로채는 것일까? 이 깨달음은 동물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작가 조지 오웰은 인간과 동물로 비유하였지만 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이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소작농과 지주의 관계와 유사하다. 땅을 가진 이들은 무슨 능력이 있을까? 그들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곡식을 재배하지 않는다. 단지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가졌을 뿐이다. 농사에 필요한 모든 노동은 소작농들의 몫이다. 그럼에도 지주들은 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소작농들의 이익을 가로챈다. 이는 정당할까? 소작농들은 본인의 노동에 알맞은 대우를 받고 있을까?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과거에는 ‘토지’가 그 기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기준이 다양하다. 건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공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건물주는 건물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세입자들의 이익을 가로채고, 공장주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가로챈다. 이처럼 토지, 건물, 공장과 같이 생산을 위해 필요한 대상들을 ‘생산 수단’이라고 한다. 앞선 예시를 언급하며, 누군가는 노동자들은 정작 노동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들은 과분한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가 바로 마르크스였다. 즉, 가치는 노동에서 오지만 노동자들은 그들이 생산해낸 가치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주위의 습격
“그때 가서도 내가 갈기에 댕기를 매고 다닐 수 있을까요?”
“동무,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댕기라는 건 바로 노예의 표시요. 댕기보다 자유가 더 값지다는 걸 모른단 말이오?”
몰리는 그 말에 동의했지만 내심 아주 완전히 납득한 눈치는 아니었다. (21p)
아리땁지만 머리는 텅 빈 흰 암말 몰리는 농장 주인 존스 씨의 마차를 끄는 일을 맡고 있다. 반란 이후에도 댕기에 집착하는 모습은 많은 생각이 들게끔 한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댕기에 집착하도록 만들었을까?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해.”, “안정적인 직업을 택해야 해.” 인생이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해볼 여유 없이 출발선 위에 선다. 이미 서열화된 대학과 학벌주의 사회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많은 수험생은 앞만 보고 달린다. 그렇게 좋은 대학 타이틀을 거머쥐더라도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좋은 직장을 위해 한 번 더 달린다. 이젠 정말 끝인가 싶었지만, 아직 내 집을 마련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먹고 살기 바쁘니 결혼은 늦어지고 아이 낳기는 두려워진다. 저출산 현상이 심해지니 고령화 현상도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일자리가 많은 지역으로 모이다 보니 젊은이들은 도시로 향하고 시골은 텅텅 빈다.
대학 서열화 및 지나친 학벌주의, 사교육 집중 현상, 저출산·고령화,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 등 오늘날의 거의 모든 사회 문제는 ‘경쟁’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생존할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경쟁에 눈이 멀어 ‘나’를 충분히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 좋은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게 좋은 것일까?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은 무엇일까? 과연 정해진, 절대적인 대상일까? 나에게 좋다면 그걸로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은 무엇일까. 고민이 끝났다면 그것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다만 대기업이 최고이고, 의대가 제일이라는 식의 ‘좋음을 규정하는 사회’에 아쉬움을 느낄 뿐이다.
댕기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생각은 획일화되고 다양성은 줄어든다. 그렇기에 모두 집착을 떨치고 진정 본인이 추구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지만, 과연 나 또한 그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도 몰리처럼, 세속적인 것들을 놓아주어야 할 시기가 오더라도 과거의 것들을 꼭 쥐고 다가올 미래를 반기지 못하지는 않을까. 현재의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왜 그것을 쥐고자 하는지 돌아보게 되는 대목이다.
잉여의 재해석
반란 이후 동물 농장은 꽤 순항했다. 암소들의 젖이 다섯 양동이나 남을 정도였다. 다들 남은 우유를 어떻게 할지 궁금해했지만, 리더인 돼지 나폴레옹은 우유는 관심 끄고 건초 수확에 열중하자고 말한다.
동물들은 건초용 꼴을 베기 위해 풀밭으로 전진했다.
저녁때 그들이 돌아와 보니 우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29p)
나폴레옹은 잉여를 향한 욕심을 떨칠 수 없었고, 결국 남은 우유들은 돼지들의 차지가 된다. 이를 계기로 돼지들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격차가 발생하고 결국 동물농장은 자연스레 계급 사회로 변화한다.
사실 평등의 척도는 잉여의 분배가 아닐까? 고대 역사를 보아도 철제 농기구의 개발과 농사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농작물의 잉여가 발생한 시점부터 계급이 등장한다. 먹을 것이 넉넉지 못해 나눠 먹던 시기에는 계급이 생길 여유가 없었다. 잉여의 등장이 계급 사회를 불러왔고 ‘평등’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잉여를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곧 평등의 본질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경쟁을 통해 잉여를 분배한다. 이는 앞선 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닌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경쟁을 통한 분배가 최고의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 문제점들을 경험하고 있다. 경쟁이 과열되며 여러 사회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다만 현재 우리는 경쟁보다 더 나은 분배 방식을 찾지 못했다. 경쟁이 완전무결한 진리라기보다는 수년에 걸쳐 인간들이 고민해낸 나름의 최선책에 가깝다. 그렇기에 경쟁의 문제점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하나하나씩 고쳐나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성공한 혁명이 되려면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135p, 동물농장의 마지막 구절)
인간의 모든 습관은 사악하다던 동물들의 최후는 결국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심 찼던 그들의 혁명은 왜 실패했을까.
자연스레 돼지들이 지도자가 된 이유는 그들이 글을 가장 잘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맞대 모든 동물이 지켜야 할 일곱 계명을 만들었지만, 계명의 내용을 헛간 벽에 쓰는 동물은 돼지들이었고, 적혀있는 계명들을 읽는 동물 또한 돼지들이었다. 다른 동물들은 돼지들이 인간의 것을 탐할 때마다 계명을 어긴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읽지 못했기에 계명을 확인하고 싶을 때면 항상 늙은 당나귀 벤저민이나 염소 뮤리얼에게 부탁했다. 심지어 일곱 계명의 내용이 바뀐 것 같으면 그들은 그들의 기억을 의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일곱 계명은 하나의 계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곱 계명은 오간 데 없고 단 하나의 계명만이 거기 적혀있었다. 그 계명은 이러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128p)
읽고 쓰지 못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그들의 무지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인간답기를 거부하며 혁명을 일으켰지만, 인간다워지고자 하는 돼지들의 욕심을 억누를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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